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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지리상의 개념으로 해당 고을을 대표하는 산을 부르는 진산(鎭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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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산(鎭山)이란 각 고을(소재지)의 뒤(주로 북쪽)에 있는 큰 산으로, 주산(主山)이라고도 하며 풍수지리상의 개념이다. 진산(鎭山)은 일반적으로 해당 고을을 대표하는 산이기도 하지만, 인천의 경우처럼 진산(소래산)이 아닌 다른 산(문학산)이 사실상의 영산(靈山)/주산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다만 해당 지역구분은 현재의 행정구역이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고, 구한말까지 이어져 온 전통적인 고을들이 기준임을 유의해야 한다.

 

진산으로 본 한국의 풍수지리를 한번 알아보자. 한국의 풍수지리의 유래에 관해서는 흔히 신라 말기에 불교 선종의 승려들이 중국에서 수입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자생설, 신라 중기 도입설 등도 근거를 갖고 있어 여전히 논의중인 상태이다.

다만 이 학문이 역사적으로 눈에 띄게 성장한 것은 후삼국시대로, 신라 말기 이전 도입설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이 이전에는 극히 일부 지배계층만의 고급 지식이었다고 주장한다. 왕권이 약화되고 지방의 호족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선종과 함께 인기를 끌고, 사회 전환의 추진력이 됐을 때였다. 호족들은 저마다 자신의 근거지를 명당화해 자기 권위를 확립하였으며, 지방에서 어느 정도 커진 호족들은 이를 사상적 기반으로 반란 루트를 타기도 했다.

 

이후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계속 발전하여 조선시대에 가장 번성하게 되었으며, 조선 중기 이후 사람이 살아가는 땅인 양택을 중심의 풍수학설이 사람이 죽은 뒤에 묻히는 땅, 음택을 중심으로 변화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변화는 설화나 야사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신라시대에는 석탈해가 좋은 자리를 얻기 위해 호공의 집을 뺏었다고 하며 고려 시대에는 왕건의 아버지가 왕기를 받기 위해 개경에 자리잡았다고 하는데, 이는 주거 중심의 풍수지리의 학설을 반영하는 이야기이다. 반면 조선 시대에는 태조 이성계의 묏자리가 좋았던 덕에 왕이 되었다, 세종의 묘를 잘못 써서 장손이 망했다, 흥선대원군이 묏자리를 '만 대에 걸쳐 영화를 누리는 자리'가 아니라 '두 사람의 황제가 나오는 자리'에 잡아서 대한제국의 말로가 비참했다는 등 묏자리 중심의 풍수학설을 반영하는 이야기가 중심이다.

 

조선시대의 사대부 유학자들은 '풍수지리는 미신같은 괴력낙신이니, 그렇게 풍수가 중요하면 공자님이 왜 한 마디도 언급을 안했냐느니 이런 걸 추종해서야 되겠냐'고 신나게 떠들다가 조상 무덤 자리는 풍수지리 상으로 좋은 곳에 잡으려고 몇 대에 걸쳐서 산송을 일삼곤 하는 참으로 이중적인 행태를 보여주었다. 풍수를 믿던 유학자와 공자 말씀대로 미신이라고 까던 유학자가 따로 있었던 것 아닐까 싶다.

 

현재의 풍수학설은 민간에서는 토착신앙 비스무리한 것이 되었다. 일반적으로는 묏자리 잡는 용도로 사용되는 일종의 미신 취급을 받지만, 그래도 아직 많은 사람들이 조상 묘는 명당에 모시려 기를 쓰고 있으며 관공서나 건물의 입주 등 실생활에도 응용되고 있다. 국립묘지, 박물관, 시청과 도청 급의 건물들은 모두 풍수를 고려하여 위치를 선정한다고 하며, 홍콩은 도시 자체가 풍수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심지어 세종특별자치시 건설에서도 풍수지리가 고려되었다. 정치에 이용되는 것도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물론 정치에 이용된 것치고 좋은 결말이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기업 건물이 풍수지리 자문을 받아 짓는다는 이야기는 이미 도시전설의 영역이니까 지나가는게 좋겠다.

 

한국사에서 풍수지리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도시는 단연 개성으로, 도시 배치 자체가 송악산자락의 지형에 최대한 맞춰져있다. 궁궐인 만월대를 둘러싼 궁성은 시가지 서북쪽 끄트머리를 차지하고 있고, 궁궐의 정문은 동향으로 나 있으며, 도로망 역시 바둑판과는 거리가 멀다. 중국의 영향을 받아 궁궐이 도시의 중심에 위치하고 바둑판처럼 구획이 나뉜 부여군, 경주시, 서울특별시를 생각하고 개성시가지 지도를 들여다본 많은 사람들은 사회주의체제도 어찌하지 못한 그 난개발스러움에 적잖이 당황하기도 했다. 고려는 한국 양택풍수의 최전성기였던 시기로, 묘청이 풍수지리에 입각해 천도대상지로 건설한 평양 대화궁도 드넓은 대동강변이 아닌 평양 동북쪽 입불산 기슭에 쳐박혀있다. 서울로 따지면 풍수지리 좋다고 경복궁을 우이동에 박아넣은 꼴이다.

 

반면 한성은 세간에 파다한 인식과 달리 그다지 풍수지리의 영향을 크게 받은 도시는 아니다. 애초에 형세가 좋다고 하여 처음 도성공사를 시작한 곳은 계룡산 신도안이었고, 신도안 건설이 중지된 이후 천도논의에서 이 분야 전문직인 서운관 관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부소명당, 즉 송악 잔류를 강력하게 밀었으며, 그 와중에 하륜의 무악천도론도 제기되었다. 이런 모든 논란을 일거에 잠재운 것이 명에 사신으로 출장갔다가 돌아온 정도전으로, 그는 상소를 통해 송경(개성)이 국토의 중앙이기는 하나 땅이 너무 비좁아 도읍으로는 마땅치 못하다고 비판하는 한편, 쟤들이 음양술수 소리만 해대는데 중국사 봐도 그딴거 없거등요?라며 한양 천도를 반대하는 풍수쟁이들을 대차게 디스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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